일본인이 한국을 싫어할 수 없는 “역사적 이유”는?
일본인이 한국을 싫어할 수 없는 “역사적 이유”는?
2020년 8월28일 Gold online
비즈니스로 해외 사람들과 관계될 적, 자국의 역사 지식은 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이 주목하지 않는 것이, “외국인에게 관심이 높은 일본사의 주제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본연재는, 주식회사 글로벌 다이나믹스 대표이사역 사장인 야마나카 준지씨의 저서 “세계 96개국을 돈 전직 외교관이 가르쳐주는 외국인으로부터 찔리는 일본역사 12개의 급소”(아사히신문출판)으로부터 일부를 발췌하여, 저자의 외교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외국인의 흥미를 끄는 에피소드를 해설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나라시대로부터 헤이안시대의 일본에 있어서, 세계와의 연결고기를 소개 하겠습니다.
백제와 야마토 정권은, 꽤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조선반도를 경유해서 일본에 전해진 것 가운데, 그 후의 일본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불교입니다.
일본에 불교를 전한 것은, 당시의 백제의 국왕의 사절이었습니다. 백제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은 꽤 긴밀한 관계에 있어서, 많은 도래인이 일본에 왔습니다. 이전에는 귀화인이라는 말도 사용 했습니다만, 당시에는 현재같이 국적은 명확하지 않고 귀화라고 하는 개념도 없었으므로, 도래인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애초에 국민국가를 전제로하는 국적이라고 하는 개념은 근대국가가 되고나서 생긴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말이나 민족이 다르다고하는 것은 서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고, 외국이라고 하는 개념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적이라고 하는 틀 묶인 생각은 현재보다도 희박했습니다. 어떤 의미로, 현재 이상으로 자유롭게 왕래했던 글로벌한 시대였습니다.
7세기말에서 8세기초두에 축조된 나라현 아스카 마을의 다카마츠 고분의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이 벽화를 보면, 일본이 고대로부터 중국이나 조선반도의 영향을 받아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자의 그림의 의복은 고구려와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벽화의 발견은 일본과 대륙의 문화교류의 깊이를 더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래인은, 중국계도 많이 있었으므로, 조선반도계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야마토 정권의 중핵으로 활약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헤이안교를 개벽한 것으로 교과서에 등장하는 간무천황의 어머니인 다카노노이가사는 “속일본기”에 의하면 백제계열의 도래인 출신입니다. 도래인의 활약에 의해 조정내부에 있어서 지위가 높아져, 천황을 낳을 정도까지 달했던 것잉ㅂ니다.
당시의 조정에서는, 천황이 되기 위해서는 모친의 집안이 굉장히 중시되었기 때문에, 본래라면, 당시, 집안이 높다고 말할 수 없는 백제계역의 도래인인 다카노노이가사를 어머니로 둔 간무천황이 즉위할 가능성은 낮았습니다. 하지만, 간무천황이 즉위하게 되어, 그 이후 백제계열의 도래인의 집안이 상승을 초래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헤이죠교에서 나가오카교, 헤인안교에 달하는 시대에는, 천황의 주변에서 다수의 도래인이 활약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가오카교 조성을 주도한 후지노와라 타네츠쿠의 어머니는 도래인인 태씨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관으로 도래인이나 그 손자는 다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빈민층에 머물렀던 도래인도 다수 있었을 것입니다.) 의외로, 간무천황의 시대의 조정은 다국적으로 글로벌화되어 있었습니다.
현재의 상왕(=은퇴한 일왕 아키히토를 의미.)이 일왕이었을 대, 2001(헤이세이13)년의 탄생일에 있어서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내 자신으로써는, 간무천황의 생모가 백재의 무령왕의 손자인 것과,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한국과의 연고를 느끼고 있습니다. 무령왕은 일본과의 관계가 깊어, 이때 이래로,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빙받게 되었습니다. 또, 무령왕의 자식,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문화를 승화하여 “국풍문화”로
아스카시대로부터 헤이안초기에 있어서 세계의 대국이었던 당나라에 사절을 보내는 것은, 일본의 경제나 문화에 대해 큰 영향을 가지는 일이 되었습니다. 견수사나 견당사를 통해서, 하역품과 함께 중국의 서적이나 문화양식이 다수 일본에 왔습니다.
당시의 당나라는, 조선반도의 신라 등 주변국 대부분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있었습니다.
조공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황제에 대해 주변국의 군주가 공물을 헌상하여, 대신 중국의 황제가 많은 보물을 하사하는 짜임새입니다.
중국의 황제를 위로 보는 짜임새이므로, 당과의 대등함을 주장하는 일본은 조선반도의 신라 등 다른 주변국과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를 위해, 일본의 견수사나 견당사는 조공이 아니라는 견해와, 조공의 한 종류라고 보는 견해의 양방이 있습니다. 황제 앞에서의 서열을 신라와 경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옛날도 외교의 현장에서는, 자리순이나 서열로 시끄러운 것입니다.
중국의 황제는 공물보다 많은 답례품을 보내는 것이 통상적인 예시였습니다. 조공하는 측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이점이 있던 것입니다. (반대로 반례품이 적어 난폭한 짓을 하는 사절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약 300년에 걸쳐 지속되다 끊기기를 계속했던 견수사, 견당사입니다만, 당의 쇠퇴에 의한 정치적 의의의 저하나 상선에 의한 문물왕래의 활발화에 의해 9세기말에는 견수사가 폐지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일본은 견당사로부터의 문물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독자의 문화를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참으로 융통무애(=융통성이 있음)이며 창의적인 궁리입니다.
우선은, 이제까지의 한문 대신 현재의 히라가나를 사용한 가나문자가 탄생했습니다. 이 시대까지는, 한자의 음훈을 빌린 만엽가나가 사용되었습니다. 가나문자를 짊어진 것은 “겐지모노가타리”의 무라사키 시키부, “마쿠라노 소우시”의 세이쇼 나곤, “사라시나 닛기”의 스가와라노 다카스에의 딸과 같은 여류문학자였습니다.
또, 귀족의 저택으로써 당풍을 탈피한 침전양식이 생겼씁니다. 침전양식으로는, 마루가 높고, 구두를 벗어 집에 들어가는 등 후세의 일본 건축의 원류가 태어났습니다. 이 침전양식은, 메이지유신후에 동경의 황거를 건조할 때도 참고가 될 정도로, 그 이후의 일본문화에 영향을 남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림으로는 일본식 그림이 탄생해서 완만한 선과 고급스러운 채색의 일본풍 그림이 생겨났습니다.
헤이안시대의 국풍문화에는 현재의 우리들의 생활과 연결되는 것도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현재에도 관계가 있는 일본식 문화의 원점이 탄생한 것입니다.
야마나카 준지 山中 俊之
주식회사 글로벌 다이나믹스 대표자
https://news.yahoo.co.jp/articles/51a130e5eea718f4d82839a3aaf6d146c6f9d2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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