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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노지의 변, 죽음을 각오했던 노부나가가 취한 최후의 행동 본문
혼노지의 변, 죽음을 각오했던 노부나가가 취한 최후의 행동
오다노부나가 “유체”의 행방은? 전국시대의 수수께끼와 진실을 쫓다
2018년10월16일 – JB Press
중요시 되고 있었던 대장의 유체의 확보
타이쇼10년(1582년)의 6월2일, 천하인으로서 군림하고 있었던 오다노부나가가, 교토의 혼노지에서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에 의해 죽음에 쫓기게 되었습니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혼노지의 변”입니다.
돌발적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혼노지에서 전투도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의미로봐서, ‘혼노지의 전투”라고 읽어도 지장은 없습니다.
노부나가는, 모리 데루모토에 소속된 성이었던 빗추국(오카야아현)의 다카마츠성 공격을 하고 있는 가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원하기 위해서 올라와서, 이날은 혼노지에 숙박하고 있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조정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교토에 성을 축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든 장군에게 출진을 명했기 때문에, 노부나가 자신은 100명정도의 종자밖에 데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미쓰히데에게 있어서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기습은 “밤에 치고 아침에 달려간다”는 것이 상투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적이 방심하고 있는 심야나 이른 아침에 기습하는 것으로, 의표를 찌른다고 하는 전술입니다. 미쓰히데의 군세가 혼노지를 포위한 것은, 오전 6시경이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아침에 기습”입니다. 혼노지는 돌담과 해자를 가진 성곽사원으로, 그 나름대로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만3천명이라고 불리는 대군에 포위 되어서는 할 수 있는 전술은 없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결국, 가까스로 방어전을 한 것만으로, 노부나가는 자결했습니다. 미쓰히데는 오전 8시경에는, 포위를 풀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가까운 곳인 묘각사에 숙박하고 있었던 노부나가의 적남 노부타다도 자살의 위협에 처해있었습니다. (역자주 : 전국시대 무장이 포위되어 패배하면 적에게 잡히기 전에 자살하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임.)
이 혼노지의 변으로, 혼노지는 소실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아케치 미쓰히데가 노부나가의 유체를 찾으려 했으나, 아무리 찾아봐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아케치 미쓰히데를 교토의 야마자키에 두고 격파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유체를 수색 시켜도, 역시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 해이 10월에, 히데요시는 교토의 대덕사에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거행하였으나, 유체가 없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은 등신대의 목상을 태워서, 그것을 화장 후 남은 재 대신에 유골에 넣었습니다.
전국시대의 전투에 있어서, 전투에서 이긴 측이 진 측의 유체, 특히 대장의 유체를 확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시되었던 것입니다. 전투에서 강적을 물리치면, 목을 치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적을 물리치는 것은, 목과 몸통을 분단시키는 것 밖에 없습니다. 현대의 감각으로 말하자면, 대단히 잔혹한 일이지만, 그것이 당시의 방식이었습니다.
“구비짓켄(=목실험)”이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생각해서 정했던 효수한 목 걸기
(역자주 : 구비짓켄 – 전투 후 부하들이 대장에게 적의 목을 자른 것을 보여주고 논공행상을 판단하는 것. 목을 자르고 높게 걸어서 공적이 소문으로 퍼지게 함.)
전투에 이긴 측은, 진 측의 대장의 목을 사용해서, 구비짓켄을 시행합니다. 구비짓켄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 목이 본인의 것인가 아닌가를 조사하는 것입니다. 현대처럼 사진 등이 없는 시대, 이름은 알려져 있어도, 얼굴까지 알려져 있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욱이, 적의 대장이라도 된다면, 얼굴을 보는 기회조차,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가신이나, 무엇인가 접점이 있었던 사람을 불러서, 확인 시킨 것입니다. 구비짓켄으로, 본인의 것이라고 확인된 목은, 걸어서 보이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확실히 목을 쳐낸 것을 공개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영토에서만이 아닌, 다른 나라까지 소문으로 퍼질 것을 예측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일정한 기간 걸어두었던 목은, 역할을 마친 것이 되어, 매장됩니다. 덤으로, 목을 매장한 무덤의 목무덤이라고 부르며, 몸을 매장한 무덤을 몸무덤이라고 부릅니다. 전투중에 죽은 경우, 이 목무덤과 몸무덤은, 대부분의 경우, 별도의 장소에 존재하게 됩니다.
노부나가 자신도, 수 차례 출진을 해서, 다양한 구비짓켄을 시행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에이로쿠3년(1560년)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그 때의 거성이 있었던 기요스에 가지고 돌아가 걸어 두었습니다. 또, 다이쇼 원년(1573년)에는,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사히 나가마사를 토벌하고, 그 목을 “하쿠다미”로 만들어서 신년회에 보여 주었습니다. “하쿠다미”라는 것은, 두개골에 옻을 발라서, 금가루를 입히는 것을 말합니다.
노부나가가 적의 머리를 이렇게 취급한 것은, 목을 공개하는 것의 효과를 이해하고 있었기 대문입니다. 그런 노부나가가, 자신의 죽음을 각오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유체의 취급방식이었던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목이 미쓰히데의 손에 넘어가면, 분명 공개되어, 미쓰히데의 모반이 정당화 될 것을, 노부나가는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있었음에 분명 합니다. 목을 공개한다는 것은, 명예로운 죽음이 아닌, 죄인으로써 죽임당했다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목을 공개하는 것으로, 노부나가의 죄를 호소하고, 모반을 정당화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유학자인 오제 호안이 적었던 “노부나가기”라는 노부나가의 일대기에는, 혼노지를 점거한 미쓰히데는, “목을 구하려해도 보이지 않아서, 미쓰히데는 깊이 괴로워하며, 가장 우려해서 심지어, 개인 병사에게 명령해서 찾으려 했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으며, 유골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 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노부나가의 목을 수색시켰으나, 뼈조차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 미쓰히데는 안절부절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노부나가기”는 에도시대의 기록이므로, 사실인지 어떤지는 모릅니다. 단지, 목이 발견되지 않은 것에 동요했던 것은 확실할 것입니다.
혹시, 미쓰히데가 노부나가의 목을 손에 넣었다면, 모반의 대의명분을 얻는 것이 분명했을 것입니다. 대의명분이 있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야마자키 전투에서도 승리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신하들에게, “노부나가님은 살아 있으므로, 함께 미쓰히데를 토벌하자”라고 편지로 불렀습니다. 가령 노부나가가 미쓰히데에게 의해 확실하게 토벌되었던 것이 명확하게 되었다면, 그 결과 미쓰히데에게 복종했던 노부나가의 신하들도, 많았지 않았을까요. 전후시대의 무사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군에 대한 충의가 아닌, 자신의 가문을 존속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유체의 행방입니다. 왜, 혼노지의 불탄자리에서 발견되지 않은 것일까요? 생각할 만한 것은, 누군가가 혼노지의 밖으로 옮겼던지, 혹은 유체가 완전히 흔적도 없이 타버렸던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실은, 혼노지에서 노부나가의 유체가 옮겨졌다는 이야기도 존재 합니다. 세상에 노부나가의 모덤이라고 불리는 것은 다수 존재하고 있으나, 그 무덤에 노부나가의 유체 혹은 화장 후 재가 매장되어 있는 것이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공식적인 묘지로 한 다이도쿠지조차, 목상을 태운 재를 화장 후 재 대신 사용했을 정도 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노부나가의 유체를 매장했다는 절, 연고를 사진 사원이 2개 존재합니다.
하나는, 교토에 있는 정토종의 아미타사입니다. 혼노지의 변 직후, 노부나가 들이 잤으니까 친교가 있었던 아미타사의 고승이, 노부나가의 유체를 운반해와서, 매장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경내에는 “오다 노부나가 노부타다 무리 묘소”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노부나가 뿐만 아니라, 아들인 노부타다나 가신인 모리 란마루 등, 일련의 전투에 죽었던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당시, 승려는 속세와는 연고가 없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으므로, 고승이 혼노지에 들어가는 것은 인정되었을 것입니다.
단지, 실제로 노부나가의 유체가 매장되어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속과 연고가 없다고 해도, 노부나가의 유체를 운반해 나가는 것은, 미쓰히데에게 용인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혹시 유체가 확실히 매장되었다고 한다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부러 노부나가의 목상을 태워서 재 대신으로 사용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노부나가 연고가 있는 인물의 묘소도 되고 있다고 하면, 혼노지나 묘각사에서 발견된 유골을 모아서, 노부나가, 노부타다 부자를 시작으로 하는 “토벌되어 죽은 무리”로써 공양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의 사원은,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스루가국(시즈오카현)에 있는 일련종의 서산 본문사입니다. 이 서산 본문사의 제 18세일순 고승의 아버지가 하라 무네야스라고 하는 무사로, 이 하라 무네야스가 관계되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혼노지의 변 전날밤, 사실은 혼노지에 있어서 일련종의 승려인 일해 고승이 카시오리켄과 바둑 대국을 두고 있었습니다. 덤으로, 일해고승은 후에 혼인보우산사라고 불리는 바둑의 명수이며, 하라 무네야스는 이 일해고승을 따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혼노지의 변에서 노부나가가 자해한 후, 하라 무네야스는 일해고승에 맡겨져, 노부나가의 목을 몰래 혼노지로부터 가지고 나와, 본문사에 매장했다고 합니다. 이 장소에는 호랑가시나무(=히이라기)가 심어졌다고 하여, 이 호랑가시나무 시즈오카현의 천연 기념물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를 느끼게 합니다.
단지, 스루가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토입니다. 교토에서 스루가국에 갈때까지는 노부나가의 본국인 오와리국(아이치현)을 지나가기 때문에, 노부나가의 적남 노부타다는 자해했더라도, 노부나가의 일족이나 가신에게 넘기는 것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일부러, 멀리있는 스루가국까지 운반 할 이유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각오했던 노부나가가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죽는 것이 아닌, 죽은 다음의 일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이 때, 노부나가는 아직 노부타다의 죽음을 모릅니다. 목이 미쓰히데의 손에 넘어가면, 노부타다도 위험하게 된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입니다. 노부타다가 만일 토벌 되더라도, 차남 노부오나 삼남 노부타카도, 위험에 처해 버립니다.
그럴 때, 노부나가가 취할 만한 선택지는 두가지 밖에 없습니다.
노부나가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유체를 태우던지, 묻게 합니다.
혹은, 혼노지 밖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확실한 인물에게 맡겨서 밖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도중에 미쓰히데에게 빼앗길 가능성도 있습니다. 노부나가와 친교가 있었던 이에야스 모임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머리털에서 뼈까지 완전히 다 타버렸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미쓰히데에게 빼앗기는 위험을 알고 노부나가가 목을 밖으로 옮기려고 했을지 어떨지. 수수께끼는 끊이지 않지만, 다들 어떻게 생각하실지요.
http://jbpress.ismedia.jp/articles/-/54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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