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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에 생애 미혼자가 많았던 “슬픈사정”

mmplz 2019. 2. 22. 20:03

에도시대에 생애 미혼자가 많았던 슬픈사정

2/21() 9:15

 


에도시대는 지금과는 다른의미로 생애미혼인 사람이 많았습니다. 고용된 상인이 독립 가능했던것은 빨라돋 30세정도였으나, 에도시대의 평균수명은 30대였습니다. 결혼 한다던지, 아이를 낳는다던지 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 남을 것이 무엇보다도 어려웠던 것입니다.

 

*본고는, 모리타 겐지 에도 삶의 안쪽, 최적하고 평화롭게 사는 지혜”(중공신거)의 일부를 재편집한 것입니다.

 

장남이외의 남성10살이면 고용살이를 시작했다.


에도의 서민을 대표하는 것은 ,계급의 사람들입니다. 활성화된 거대도시에 살고 있었던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인생을 보냈던 것일까요. 이것을 포목전에서 근무하는 상인 남성을 예를 들어 생각 해보고 싶습니다.

 

에도시대의 포목전은 대형 가계를 제외하고, 그 대부분이 가족경영이었습니다. 가계와 거주지가 똑같은 건물로, 가족이 종업원을 겸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노동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족 이외의 종업원도 고용하였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경영자 가족과 같이 거주하는 고용살이였습니다.

 

고용살이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똑 같은 상가뿐만 아니라, 근처의 지역의 농가등의 장남이외의 남성이었습니다. 장남은 가독(=후계)을 잇고, 상가나 농가의 주인이 됩니다. 하지만, 차남 아래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연을 더듬어(=아는 사람을 통해), 상가 등에 고용살이를 하러 나가는 것입니다. 고용살이를 하러 나가지 않고 그대로 집에 계속 사는 경우는, 결혼도 허용되지 않고, 식객 같은 입장으로 숨어사는 것 처럼 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용살이를 하는 연령은 대부분 10살 전후 입니다. 서당에서 읽기, 쓰기, 계산을 배우고, 그것이 대체로 몸에 익을 때 일것입니다. 아직 어리광 부리고 싶은 아이들일 것이라고도 생각 되어지지만, 이 시기부터 집을 나가 견습생이라고 불리는 고용살이 종업원이 됩니다.

*탈락해도 집에는 있을 곳이 없다.

견습생인 그들에게, 말하자면 급료는 나오지 않습니다. 먹고 자는 것에 대한 보장이 급료대신인 것입니다. 애초에, 견습생은 그다지 노동력으로써 기능을 하지 않고, 연수를 받고 있는 단계 입니다. 가능한 업무라고 한다면, 청소나 힘쓰는일 정도의 잡무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돈을 받는게 이상하기도 합니다.

 

단지, 음력 7월보름과 정월에는 주로 현물지급으로 보너스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시키세라고 불렸습니다. 현재에도 위에서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의 오시키세라고 하는 말이 남아 있습니다만, 유래는 이 시키세 입니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견습생의 단계에서 탈락하는 아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휴일도 없이, 오직 견습일만 하는 날들은, 10대 전반의 아이들에게는 괴로웠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은, 부모님 집에 돌아가도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만두고 돌아가도, 또 다른 고용살이할 곳을 찾아서, 다시 처음부터 다시 할 뿐이었습니다.

 

견습생으로써 열심히 근무한 사람은, 빠르면 17~18세 정도에 관례를 허가받아, “우두머리 종업원으로 승진 합니다. 이 우두머리 종업원부터 정식 종업원이며, 한 명분의 노동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그 집에 얹혀 사는 점에 있어서는 견습생과 동일 합니다.

 

위에 계제한 오래된 사진은, 메이지 시대 초기의 포목전을 찍은 것입니다. 에도시대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고 해도 맞을 것입니다. 중앙에 있어서, 손님인 여성의 머리색을 엿보고 있는 남성이, 이 가계의 우두머리 종업원 입니다. 아직 꽤 젊어 보입니다.

 

대체 언제 결혼한것인가?


우두머리 종업원이 된 이후, 대체로 10년 이상 일하여, 종업원으로써 우수하다고 인정받게 된다면, “반도우로 승진합니다. 이것이, 종업원으로써의 최고의 직위였습니다. 앞에 사진으로 말하면, 오른쪽에 쥐에 붓을 끼워넣고, 주판을 튕기고 있는 남성이, 이 가계의 반도우입니다. 우두머리 종업원에 비하면, 얼굴도 꽤나 관록이 있는 것처럼 생각 됩니다.

 

반도우가 된 후에, 더욱 업무에 매진하여, 주인의 신뢰를 획득한 자는, 분점을 세우는 것이 허락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상인 누구나가 동경했던, 독립개업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그들의 인생을 쳐다봐서, 어떤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그들은 대체 언제쯤에 결혼을 했던 것일까요.


우두머리 종업원으로 승진하면, 하오리의 착용이나, 술, 담배당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앞에 서술한 바와 같이, 사는 곳은 견습생과 동일한 상태인, 점포를 겸한 주인의 집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추측 가능한 것처럼, 우두머리 종업원에게 결혼은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한 사람 몫이 되어, 자신의 집을 가지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반도우가 된 후입니다. 이 때에 그들의 연령은 30정도일 것입니다. 승진이 빠른 우수한 사람이 이 연령이므로, 그다지 능력이 높지 않은 경우, 노력해도 반도우가 되는 것은 30대 후반이었습니다.


결혼가능했다고 해도 30대 넘어


그래서, 고용된 상인의 대부분은, 무사히 결혼 했다고 해도, 그 연령은 30세를 넘었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역사인구학자인 기토우 히로시씨는에도시대의 초혼연령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에도시대의 남녀는 꽤 조혼을 했다고 이야기 된다. 확실히 초혼연령이 여성이 27살에 남성이 28살정도 되는 현재의 시점에서 본다면 그 말대로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에게는 맞지만, 남자의 초혼연령은 일반적으로 현대의 수준에 가까웠다. 중앙일본의 농촌에서는, 18,19세기에 있어서 장기적인 평균초혼연령은 남25~28세, 여18~24세의 사이에 있었다. 부부의 연령 차이는 보통 5~7살, 남자가 연상이고 현재보다도 꽤 컸다. 그러나 에도시에의 초혼연령은 지역이나 계층 등에 따라서, 상당히 큰 차가 있었다. -- "인구로부터 읽는 일본의 역사"


이 극도로 정리된 문장은, 많은 사람이 에도시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뒤집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에도시대, 그것도 농촌에 있어서는, 초혼연령은 상당히 낮았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경우,  남성은 25~28세정도 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이것은, 평균연령인 것에 주의가 필요 합니다. 좀 더 높은 연령에 다다르고 나서, 초혼을 한 사람도 많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한, 2015년의 후생노동성 통계정보부 "인구동태총계"에 따르면, 평균초혼연령은 남자가 31.1세, 여자가 29.4세로 되어 있습니다. 에도시대의 평균초혼연령은, 현재보다 남자가 3~6세정도, 여자은 5~11세 정도 젋었다는 것이 됩니다. 편차가 큰 여자는 둘째치고, 역시 에도시대라고 해도, 남성은 그다지 빨리 결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시부에 유입된 사람들이 "점점 죽어갔다"


앞에 "고용된 상인"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30세를 넘었어도, 최종적으로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가졌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꽤나 인생이라고 할 사고방식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또 정확한 사실의 인식에 기초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적지 않은 "고용된 상인"이, 결혼을 한다던지, 아이를 만든다던지 하기 전에, "죽어갔기" 때문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에도시대에 한정하면 이것은 틀림 없습것입니다. .


이미 소개했던 데이터입니다만, 에도시대의 중,후기, 미노지방의 농촌에 있어서 여성의 합계특수출생율은 5.81이었습니다. 여성들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은 아이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도시대에 있어서 일본의 총인구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중반까지, 일본의 인구는 약 3000만명으로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왜 증가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여기에는, 커다란 이유가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유아의 사망률이 상당히 높았던 점. 또 하나는, 도시부로 유입된 사람들이, "점점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손을 남기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난 사람도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7살까지는 신의영역"이라고 말하여졌다.


많은 역사인구학자의 연구에 따라서, 에도시대의 평균수명은 265년간을 통해, 30살 정도 였다라고 인지되어 있습니다. "인생 50년"이라고 말하는 표현도 있습니다만, 그것에도 전혀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에도시대에 있어서, 노년까지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행병으로 돌연히 죽은사람 및 분별심이 생기기 전의 유아의 단계에서 죽었던 사람의 수가, 평균치를 끌어내려 버렸던 것입니다.


에도시대 중기~후기에 있어서, 한살미만의 유아의 사망률은 10%대 후반이라고 하는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앞에 서술한 책"인구로부터 읽는 일본의 역사") 다른 조사에서도 비슷한 숫자가 되어 있어, 당시의 농촌에 있어서는, 대체로 2세가 될때까지는 2%의 아이들이 사망하고 있었습니다.


7살까지는 신의 영역 --- 이전의 일본에는, 이러한 슬픈 말이 있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7살까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라고 하는 의미 입니다. 작은 아이가 등에져서 보살핌을 받고 있던 아기는, 언제 신의 품으로 돌아갈지 알수가 없는 "위험한 존재"였씁니다. 시치고상이라고 하는 습관은, "신이 아이를 데려가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행사입니다. 마지막이 "시치(=7)"인것도, 7살의 체력이 있으면 간단한 병으로는 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리카 겐지

오오사카학원대학 경제학부 교수

1974년 고베시 출생. 교토대학 경제학부졸업. 교토대학대학원 인간,환경학 연구과 박사후기과정단위취득 퇴학. 박사(인간,환경학). 전문은 사회사상사. 특히 에도시대의 서민문화, 사상의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221-00027679-president-soci&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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