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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그림을 그려서 시대를 뛰어 올라간 동시에 전락해버린 화가의 장렬한 인생 본문
나폴레옹 그림을 그려서 시대를 뛰어 올라간 동시에 전락해버린 화가의 장렬한 인생
“나가노케이코와 읽으며 해석하는 운명의 그림 이제 놓칠수 없다” “젊은 영웅의 탄생” 후편
“멋있는 나폴레옹”을 그림으로써 대출세
구로가 사회적입지를 확립했던 것은, 1804년부터 1808년 사이에 연달아서 발표했던, 말하자면 “나폴레옹 전쟁 3부작”에 따른다.(제작순으로 “야파의 페스트 환자를 위문하는 나폴레옹”, “아부킬의 전투”, “아이라우의 전투”).
그 속에서 가장 평가가 높은 “야파의 페스트 환자를 위문하는 나폴레옹”을 보자. 이것은 1799년의 시리아 원정 때, 항구도시 야파 (현 이스라엘의 알 아비브 지역)에서 페스트가 만연해서, 이환하는 프랑스병을 나폴레옹이 위문한 일을 역사화풍으로 그린 것이다. 구로의 풍부한 색체감각과 다이나믹한 구성력이 잘 이해된다.
무대는 모스크의 마당. 프랑스군의 병원시설로써 접수된 것이다. 원기둥 건너편에 이국풍의 건물들, 그림 왼쪽면에는 환자에게 음식물을 배급하는 아랍인이나 노예들. 전경에는 빈사상태의 환자들, 오른쪽 끝에서 눈이 안 보이는 병사가 예수에게 구원을 바라는 신자처럼, 손을 더듬으며 접근해 온다.
나폴레옹은 화면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서서, 지금도 손장갑을 하나만 벗고, 나체의 환자의 가슴에 손을 대는 장면이다. 환자가 그 행위를 당황해서 멈추게 하려고 하며, 주변의 측근은 감영을 무서워해서 손수건을 입주변에 대고 있는데도, 나폴레옹은 침착한 상태다. 이것은 고귀한 접촉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역대의 왕들이 의식으로써 행해 왔던 “손 치료”로써, 일반민중은 현세의 신과 같은 왕에게 직접 닿는 것으로 피부병, 간질, 결핵 등이 낫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소박한 사람들에게의, 이것은 실로 효과적인 어필이었다. 왜냐하면 본 작품이 살롱에서 발표된 1804년이야말로,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앉은 연도였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실각
나폴레옹이 부르봉왕 같이 그 후 대대로 계속 되었다면, 구로의 인생도 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정상에 오르는 것도 빨랐지만, 전락하는 것도 순간이었습니다. 황제가 되어 합스부르크가의 공주를 강제로 2번째 왕비로 삼아, 대를 이를 자식을 낳은 것 까지는 괜찮았지만, 정신이 들었더니 유럽 전체로부터 미움을 받아, 모국에서도 적이 늘었고, 1814년, 결국 실각해서 엘바섬으로 유배 됩니다. 다음년 백일천하는 있었지만, 이 해가 나폴레옹의 끝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구로는 이 때, 한창 일할나이인 43세 였습니다.
갓 즉위한 황제가 사라지니 부르봉 왕정이 복고합니다. 이전에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던 다비드는 프랑스에 있을 수 없게 되어, 현 벨기에의 브뤠셀로 망명했습니다. 조각가 가계는 는 구로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또 구로는, 왕정 복고와 함께 신설된 에콜 더 보자르의 초대 교수도 되어 그때까지 다비드가 받아서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 아카데미의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은 즉, 신고전주의를 더욱 발전 시키지않으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도 프랑스 화단의 톱에 섰던 구로에게는 수 많은 영예와 공적인 일들이 주어졌습니다. 구로는 열심히 그것에 착수 했습니다만, 그가 정말로 그리고 싶었던 것은, 조각적으로 하기 어려운 신고전주의그림이 아닌, 젊은 틀라클루아가 정력적으로 발표해낸 신선한 책체와 격한 움직임의 낭만주의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입장에 묶여서 그런 모험은 불가능했습니다. 구로로써는 정열적인 오페라를 노래하고 싶은데, 수수하고 현인이 좋아하는 독일 가곡을 부르도록 한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삐걱거리는 톱니에 고뇌했던 화가의 마지막
낭만주의의 정신적 경향은 근대적 개인주의, 감성의 해방, 동경, 열정 같은 것이었습니다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환멸이나 우울이 같이 합니다. 베르테르(괴테 작”젋은 베르테르의 슬픔”)같이 예수도 클라이스트도 고골리도 자살 했습니다. 슈만, 베를리오스, 프리드리히는 자살미수, 그리고 바이런이나 포우는 간접적인 자살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구로도 또한 깊은 우울증에 사로잡혀 갔습니다. 이미 예술을 연마하는 것 보다, 공방의 유지나 사회적 명성을 우선해와서, 생각해보니 나폴레옹에게 환멸한 것처럼 지금은 자신의 재능에도 환면하고 있었습니다. 세느강에 몸을 던진 것은 64세 때였습니다.
앤트워프=장 구로(1771~1835)는 들라루쿠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만, “키오스섬의 학살”에 대해서는 “회화의 학살이다”라고 혹평 했습니다. 그것이 구로의 한계였는지도 모릅니다.
원문출처 : http://bunshun.jp/articles/-/10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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