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plz의 관심사 블로그
세계유산 “히메지성”, 왜 성주가 어지러울 정도로 교체 되었나 – 명성으로부터 읽어내는 일본사 본문
세계유산 “히메지성”, 왜 성주가 어지러울 정도로 교체 되었나 – 명성으로부터 읽어내는 일본사
2/27(수)
수 많은 일본의 이름 있는 성 중에서도, 화려한 히메지성이 격이 높다는 것은, 아마도 이론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천수각이 있으며 (히로사키, 마츠야마 등 12개 성), 국보로 지정되어(마츠모토 등 5개성), 1993년에 법륭사와 함께 인정된 일본 최초의 세계유산이기도 합니다. 시라사기성이라고도 불리는 우아한 아름다운 모습은, 산요신간센의 차창에서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지러울 정도로 성주가 교체 되었던 역사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30개의 유명한 성으로부터 읽는 일본사” (일본경제신문 출판사)의 저자 안도 유이치로씨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도자마 대명을 감시하는 “서쪽의 에도성”
“히메지성이 역사의 무대앞에 등장하는 것은,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입성하고나서”라고 안도씨가 말합니다. 1580년, 히데요시는 오다가의 중국방면 군대의 본거지로써 복심인 구로다 요시타카(칸베)로부터 양보 받았습니다. 82년의 혼노지의 현 직후, 히데요시는 원정 목적지인 빗추 다카마쓰성으로부터 단지 2일만에 히메지성으로 돌아와, 태세를 정비하고 아케치 미쓰히데를 타도 했습니다. 히메지성은, 천하통일의 발을 잡은 출세성인 것입니다. 히데요시 후의 성주는 동생인 히데나가, 의형인 기노시타 이에사다와 친족으로 고정했습니다.
**도자마 대명 : 도쿠카와 가문과 연계가 깊지 않은 대명을 지칭.
**후다이 대명 : 세키카하라 전투 이전부터 도쿠카와 막부를 섬겼던 대명.
성주가 빈번하게 변하는 것은 1600년의 세기가하라의 전투 이후 입니다. 메이지 유신까지 10개 가문(다시 임명되는 것을 포함), 32명이 성주가 되었습니다. 똑 같은 시기에 도쿠카와장군은 이에야스로부터 도쿠카와 요시노부까지 15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초에 들어간 것은 이에야스의 사위인 이케다 데루마사로, 미카와 요시다성(15만석)으로부터 52만석으로의 발탁이었습니다.
세기가하라의 전투 이후, 이에야스는 50명을 넘는 대명의 영지를 몰수하는 대형 은퇴를 단행 했습니다만, 동군의 승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도요토미가와 연고가 있는 대명의 분전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긴키서쪽에 신뢰에 있어서 근친이나 대대로 도쿠카와가를 섬겨왔던 대명을 배치하는 것 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
안도씨는 “도자마 대명이면서 준 도쿠카와 일문이라고 말할 만한 이케다 데루마사에게 영지를 수여하고, 히메지성을 대대적으로 개수하도록 명했다”고 말합니다. “도자마 대명으로 점령된 서국에 대한 압박을 할 수 있는 성이며, 히데요시 가문을 압박 할 수 있는 성이었습니다.”(안도씨). 데루마사는 차남이나 삼남에게도 영지를 부여하여, 이케다 일족은 100만석 정도 였습니다. 실질적인 “서국장군”의 탄생이었습니다.
안도씨는 “히메지성은 서쪽의 에도성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군사요세로써도 뛰어나고, 당시의 최신 축성 기술을 응축시켜 방어력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5개의 층에 7개의 계단이 있는 천수각은 총 중량 5700톤입니다. 그것을 둘러싸는 듯이 세개의 작은 천수가 연결한 “연립식 천수”는 이에야스 창건시대의 에도성과 동일 합니다.
막부말에 “조정의 적”이 되지만 무혈개성
더욱이 저항선을 3중의 나선형으로 설계하였고, 삼중구조의 성의 정문으로부터 천수각까지는 복잡한 미로로 되어 있습니다. 굽이치고 넓어 졌다가 좁아진다던지, 내리막이된다던지, U턴한다던지 해서 똑바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루부터 천수각까지 교묘한 돌 떨어지는 곳이나 틈새, 무기걸이 등의 배치도 되어 있으며, 하얀 벽의 회반죽도 내열성에 우수합니다. 장려한 모양의 뒤쪽에 실전을 중시한 성인 것입니다.
“도요토미가 멸망후에도 산요길의 요충지로써, 히메지성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는 안도씨. 서국대명의 감시역으로써 역할이었습니다. 1616년의 데루마사의 죽음 후, 가독을 이은 미쓰마사가 아직 8살이었기 때문에, 2대 장군인 히데타다는 나라를 바꾸도록 명령 했습니다. 어려서 서국을 압박하는 업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교대한 성주는 혼다 다다마사 “도쿠카와 사천왕”인 다다카쓰의 적자로 히데타다에게 있어서는 사위의 아버지에 해당합니다.
39년에는 이에야스의 손자인 마쓰다이라 (오쿠히라) 타다아키가 성주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마쓰다이라 (유키) -사카키바라-마쓰다이라(유키) – 혼다 – 사카키바라 – 마쓰다이라(유키) – 사카이와 메이지 유신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전부 다 도쿠카와 가족의 친척대명이나 보다이 대명의 중진대명이었습니다.
안도씨는 260년간 계속되었던 히메지 성주의 인사원칙을 (1)히메지 번주에 어린사람이 착임하면 막부가 성주를 바꿀 것을 명한다. (2)교체되는 곳은 에치고의 무라카미, 무츠의 시라카와, 우에노의 아메바시 등으로 3대명 등의 연쇄적인 이동이 기본, (3)명문인 것이 원칙이므로, 히메지성주가 되는 대명가는 자연히 고정화 되었다고 분석 합니다. “똑같은 가문이 2번, 3번 봉해졌습니다.”
막부말의 사카이 다다시게는 도쿠카와 막부 최후의 대로로, 장군에게 충성을 다하는 한편, 근왕파의 제압에 힘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번주가 되었던 동생인 사카이 다다토시도, 노중(=대명을 감시하던 직책)으로써, “토리바네, 후시미의 전투”에 출병하여, 패배후에는 도쿠카와 요시노부를 따라 에도로 돌아왔습니다. 이 전개로는 히메지번이 아이즈번, 쿠와나번과 함께 토벌대상인 “조정의 적”이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일 겁니다. 신정부군은 성주부재인 히메지성을 노리고 진격 했습니다.
히메지에서 빈성을 맡고 있었던 가신단은 손쓸 도리가 없어서 결국 무혈개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복권고했던 것은, 이케다 데루마사의 자손에 해당하는 히젠번이었습니다. 성주가 “언제나 전장에 있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서국 대명에게 눈을 빛내고 있었던 “서쪽의 에도성”은 결국 군사시설로써의 진가를 발휘하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히메지성정도의 이름높은 성으로써 약간 아쉬운 부분을 느낀다고 한다면 이런 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문출처 :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227-00010003-nkbizgate-bus_all
'일본어 뉴스기사 번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자동차를 소유하는 시대”가 지금 끝나려고 하고 있다. (0) | 2019.03.05 |
|---|---|
| 지구표면의 20% 크기, 허블 망원경, 해왕성의 거대 소용돌이를 발견. (0) | 2019.03.04 |
| 나폴레옹 그림을 그려서 시대를 뛰어 올라간 동시에 전락해버린 화가의 장렬한 인생 (0) | 2019.02.26 |
| 우주의 시작은 빅뱅이 아니다! 우주 물리학자인 요시다나오키가 연구의 최선선을 말하다. (0) | 2019.02.25 |
| 에도시대에 생애 미혼자가 많았던 “슬픈사정” (0) | 2019.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