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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가 축조한 성”은 왜 폐성의 운명에 다다렀는가?

mmplz 2019. 2. 13. 23:09

오다 노부나가가 축조한 성은 왜 폐성의 운명에 다다렀는가? 유명한 성으로부터 읽어보자.

 

성을 무대로 해왔던 인간 드라마가 일본의 역사를 만든다. 역사연구가인 안도유이치로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 전형적인 케이스가 오다 노부나가의 성일 것이다. 다른 전국대명을 압도하는 현란함. 호화로운 천하인의 성을 축조했으면서도, 결국은 폐성이라는 운명에 다다렀다. “30개의 명성으로부터 읽는 일본사” (일본경제신문출판사)라부터 해독했다.


일본의 성 축조의 혁신가였던 노부나가

돌담의 기와지붕에 고층의 천수각이라고 하는 현대 성의 이미지를 만든 것은 노부나가라고 화자되어진다. “노부나가는 천하통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거성을 계속해서 바꿔갔다라고 안도씨는 말한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출진했던 기요스성으로부터 고마키산성, 기후성, 거기에 아즈치성이다. 노부나가는 본거지를 옮길 때마다, 성곽 만들기에 혁명적인 혁신을 더해갔다.

 

고마치산성에서는 돌담 만들기, 기후성에서는 금박 기와를 사용했던 보여주기 위한 성”, 아츠치성에서는 지상6, 지하1층의 장려한 천수각이다. 노부나가의 성은 후세의 성곽을 본보기가 되었다. 최신 연구에서는, 돌담도 천수각도 실은 노부나가가 최초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전국시대에서 전국통일시대를 향하여 가는 과정에서, 노부나가의 성 축조에는 본질적인 메시지가 있으며, 그렇기 떄문에 전국에 보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노부나가의 성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아즈치성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자그마한 잔존물만을 남기고 있다. 1576(덴쇼4)년에 축성을 개시했던 아즈치성은 79(7)에 완성 되지만, 3년후인 82(10)에는 전소해버린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기습한 혼노지의변이다. 혼란 속에서 아즈치성의 장대한 천수각은 화명에 쌓여, 돌담등을 남기고 재로 변해버렸다. 패권은 미쓰히데를 명망시킨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옮겨갔다.

 

안도씨는 그 이후, 아즈치성의 재건공사는 진행 되었지만, 언제인가 중지되어 버렸다라고 지적한다. 히데요시는 아즈치성의 주변에 있는 하치만야마에 눈을 두엇다. 혼노지의변 이후인 1585, 하치만산성의 축성이 시작 되었다.

 

성 아랫길을 축성하는 과정에서, 구 아즈치성으로부터는 여러 건물이 이동하여 축조 되었다. 한 예시가 현존하는 혼간지 하치만별원이다. 하치만산성은 아즈치성을 모델로해서, 상인이나 직인도 아즈치에서 하치만야마로 이동해서 길거리 만들기를 진행 시켰다고 한다. “수복이 진행되었어야 할 아즈치성의 폐성을 의미했다라고 안도씨는 말한다.

 

안도씨는 천하인의 자리를 노리는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노부나가의 존재를 이미지화 하는 성곽은 없애 버리는 편이 나았다라고 분석 한다. 히데요시는 하치만산성주로 조카인 토요토미 히데츠구를 착임시켰다.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지목된 관백 히데츠구다. 현재의 오미하지만시에는 히데츠구가 명군이었다고 평가도 전해져 오고 있다.

 

세키가라하 합전이후에 기후성, 나고야성도 폐성

 

그러나 1595(분로쿠4)에 할복을 명받고나서, 히데츠구가 살았던 교토의 주라쿠다이가 철저하게 파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성이었던 하치만산성도 폐성 되었다. 당시의 성주였던 교코구다카츠쿠에게는 일부러 가까운 오오츠성이 대신 주어졌다고 한다. 안도씨는 히데츠구의 이미지를 없애고 싶다고 생각한 히데요시의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라고 이야기 한다.

 

기후성은 곧바로는 폐성되지 않았다. “천주나 혼마루가 타서 없어졌던 아즈치성은 폐성하기에 상황이 좋았지만, 기후성은 그대로 남아 있었기 있문에라고 안도씨는 생각한다. 성주는 오다 노부타카, 이케다 모토스케, 이케다데루마사, 하시바 가츠이에, 오다 히데노부가 연이어 성주가 되었다. 히데노부는 노부나가의 적손이다.

 

그러나 1600(게이초5)의 세키가하라 합전에서 히데노부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에 속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맹주로 한 동군의 선봉대와 대치 했다. 세키가하라 합전에서 승리한 이에야스는, 전후처리로 많은 대명을 이동 시키는 과정에서 기후성을 정했다.

 

이에야스는 가까운 곳에 새로운 가노성을 지을 때, 기후성의 천수나 돌담등을 이축했다고 한다. 안도씨는 아즈치성과 하치만산성의 관계와 완전히 똑같이, 천하인을 목표로한 노부나가의 존재를 상기 시키는 성곽을 이에야스는 없애고 싶었던 것일 것다라고 한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성도 폐성 했다. 그 하나가 사가현 가라츠시의 나고야성이다. 히데요시의 조선출병의 최전선으로써 1592년에 현해탄을 면한 바닷가 언저리에 완성했다. 모든 대명의 위병 대기소는 약 130, 전국 곳곳에서 이동된 장병은 약 30만명이었다고 한다. 군수품, 생활물자를 공급하는 상인이나 건축공사에 종사하는 직인들도 모여서, 성 아랫길은 약 17만 헥타르, 인구도 20만명을 넘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이후 나고야성은 폐성으로 끝나지 않고 철저히 파괴 되었다고 안도씨는 말한다.

 

도쿠가와막부가 추진했던 오오사카성의 대개조

폐성이 아니더라도 100%개조 된 것이 오오사카성이다. 1615(겐나원년)오오사카 여름의진으로 낙성 했으나, 그 자리를 막부의 직할령으로 했던 2대장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성의 대개조에 착수했다. 성 축조의 명인으로 알려진 토우도 다카도라에게 깊이와 돌담의 높이를 2배로 하도록 명령 했다. 히데요시시대의 오오사카성을 덮어서 숨기는 것처럼 불에타서 부셔진 건물 위에 흙이 덮여 거대한 돌담이 새로 새워졌다고 한다.

 

안도씨는 히데요시가로부터 천하인의 지위를 빼앗은 도쿠카와가로써는 도요토미가의 존재를 이미지화 하는 오오사카성이 히데요시시대인 채로 남아서는 좋지않다라고 이야기한다. 대개조후에는 성주를 두지 않고, 유력한 대대로 도쿠카와집안을 모신 대명에게 성주대리라는 형태로 맡겼다. 1~2만석급의 소규모 대명부터 임명된 오오사카 정반(2), 가반(4), 본진무사로 구성된 대조직이 2개조로 부임하는 체재였다.

 

대개조후의 오오사카성은, 도쿠카와 막부에 있어서 정치, 군사의 특별히 중요한 처점으로 계속 존재했다. 오오사카성대리의 직위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면, 다음은 조정이나 서국 대명의 감찰에 해당하는 교토소사대, 더는 국정의 중신으로 승진하는 엘리트 코스였다. 막부말기의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최후의 장군 도쿠카와 요시노부가 근거지로 삼았던 곳도 오오사카성이었다. 천하인의 성의 역사는 패자본인뿐만 아니라 그 후의 사람들의 정략이나 의도도 또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원문출처 :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212-00010000-nkbizgate-bus_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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