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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신겐은 왜 아들을 “죽였던” 것일까?

mmplz 2019. 6. 6. 12:05

다케다신겐은 왜 아들을 죽였던것일까?

201964 JB Press

 

다케다 요시노부가 유폐되었었다고 전해지는 도우코우지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전국시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배패에 따라 그 전란은 더 격화됩니다. 가이의 호랑이라고 불려 그 이름을 알린 다케다 신겐은 그 때 무엇을 계획하고, 그리고 왜 멸망했던 것일까요? 역사학자 오와다 야스츠네씨가 신겐의 아들 요시노부의 죽음으로부터 그 진상을 파해쳐 갑니다.

 

*오케하자마 전투가 초래한 이마가와가의 혼란

에이로쿠3(1560)의 오케하자마 전투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오다 노부나가에 대패했습니다. 그러나, 이 오케하자마 전투에 의해, 이마가와씨가 멸망한 것은 아닙니다. 이마가와씨에게는 이미 가독을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사네()가 잇고 있었고, 권력의 이행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오케하자마 전투에 우지사네는 출진하지 않았습니다. 피해가 없는 우지사네가 복수전을 하면, 태세를 정비하는 것도 가능했얼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마가와씨의 휘하에 속해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당시에는 마쓰다이라 모토야스)가 우지사네에게 복수전을 권했으나, 우지사네가 복수전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씨로부터 이탈했다고 설명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에야스의 이ㅏㄹ을 정당화하기 위한 창작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 당시의 우지사네로 말할 것 같으면, 동요하는 나라를 적극적으로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애초에, 이마가와씨의 본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스루가만 해당하며, 도오도우미는 요시모토의 아버지 우지치카 대에 영토로 합쳐진 것입니다. 이카와나 오와리에 걸쳐서는 요시모토에 의해 갓 합병된 상태였습니다.

 

스루가는 그렇다 치고, 도오도우미, 미카와, 오와리의 토호, 즉 지방영주들에게 있어서는, 이마가와씨의 세력에 거역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복속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시모토의 죽음에 의해, 이마가와씨로부터 이탈하는 토호가 속출했던것도, 무리가 아닌 이야기 입니다. 이러한 토호의 이탈에는, 요시모토의 미카와, 오와리에 대항하는 군사행동으로, 영내가 피폐하고 있었던 것도 이유로 있었던 것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토호가 이탈한 것은, 아무것도 우지사네가 바보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다치고, 이마가와 영내에 있어서 혼란을 기회로, 서쪽 미카와에서는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오카자키성에서 자립을 달성했습니다. 실력에 의한 미카와의 평정에 착수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씨로부터 완전하게 이탈한 것입니다.

 

이것에 따라 동미카와와 도오도우미의 토호는, 도쿠카와쪽과 이마가와쪽으로 양분되어, 전란은 더욱 확대되어갑니다. 에이로쿠4(1561)부터 도쿠카와는, 서쪽 미카와에 있는 이마가와쪽의 지성을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에이로쿠 9(1566)까지는 미카와국의 평정을 달성했습니다.

 

그럴 때, 스루가쪽으로 진출을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 가이의 다케다신겐입니다.

 

*다케다신겐과 이마가와가와의 깊은 관계

애초에, 신겐은, 스루가의 이마가와씨와 사가미의 호죠씨와 말하자면 코소슨 삼국동맹을 결성했으며, 동맹을 유지하려고 하면, 스루가에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스루가로 진출은 단순하게 이마가와씨와 적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마가와씨와 동맹인 호죠씨와의 전선을 넓힌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래서, 스루가로의 진출, 즉 이마가와씨와의 단교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가신이 있더라도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신겐의 적남이었던 요시노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기 때문에, 이마가와씨와의 단교에는 적극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전국시대였기 때문에, 아내의 친정이라고해서 공격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코소슨 삼국동맹을 붕괴 시키는 것이 장래적으로 불이익과 연결된다고 하는 생각도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다케다씨의 역사와 군법을 기록한 코우요우 쿤칸에 따르면, 에이로쿠 7(1564), 요시노부를 보살펴줬던 오부 토라마사들이 신겐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는 것을, 오부 토라마사의 친동생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밀고했습니다. 그리고, 신겐은, 다음과 같은 5개의 조항을 죄상으로 들어 오부 토라마사를 처형합니다.

 

1.     신겐이 젊었을때부터, 오부 토라마사를 불러도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

2.     신겐의 전략이나 전술에 대해서, 항상, 가신의 면전에서 비판했었던 것.

3.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고전에 대해서, 신겐의 군략이 나쁘다고 공언했던 것.

4.     시나노의 카스가 토라츠나가 혼자서 수비하고 있는 것은, 신겐의 군략의 성과인 것.

5.     요시노부가 젊은 혈기의 소치로 모반을 일으켰을 때, 오부 토라마사가 충고는 커녕 주도했던 것.

 

이상의 죄상에 따라, 신겐은, 오부 토라마사들을 처형해버렸습니다. 단지, 이 때 28세인 요시노부는 죽이지 않고, 고후의 도우코우지(동광사)에 유폐시켰습니다. “코우요우 쿤칸에서는, 이것은 신겐의 자비였다라고 합니다.

 

요시노부는, 우에스기 켄신과 사투를 벌였던 가와나카지마의 전투에서도 활약 했으며, 전도유망한 청년 무장으로 성장했었습니다. 신겐으로써도, 모반의 사실여부를 확실히 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2년후인 에이로쿠 10(1567) 10, 요시노부는 유폐처인 도우코우지(동광사)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향년 30세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케다 요시노부의 묘

 

*다케다 요시노부는 자해를 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부친에게 죽임을 당했는가?

요시노부가, 어떠한 경위로 죽음에 이르렀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코우요우 쿤칸의 품 삼십삼에는 요시노부공의 자해라고 적혀 있습니다. 단지, 이점에 관해 말하자면, 동일한 코우요우 쿤칸이라도, 품삼십구에는 다른 최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겐과의 화친을 중계했던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에 대한 오다 노부나가가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으며, 노부나가는 신겐의 무도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속의 1개조에, “적자 타로(요시노부), 감옥에 있어, 짐독으로 죽인 것을 법에 곧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짐독이라고 하는 것은, 전설상의 새인 잼새의 독이라는 의미로, 단순하게 말하자면, 독살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어떤지는 불명확하지만, 적어도, 요시노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 아닌, 신겐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애초에, 오부 토라마사는, 신겐을 암살하려고 하는 것 같은 계획을 정말로 짜고 있었을까요? 이것만은, 지금에 와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신겐의 스루가 공략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많아서, 신겐에게 반발하는 가신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에이로쿠 10(1567) 8, 신겐은 가신단에게 충성을 맹세세킨 서약문을 이쿠시마타루시마 신사에 봉납했습니다. 서약문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계약서 같은 것이며, 혹시, 위반하면 신벌을 받는 것을 맹세한 것입니다. 이러한 서약문을 제출 시킨것으로도, 신겐이 가신단의 배반을 겁내고 있었던 것은 확실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으로 가신단이 정리되면, 신겐은 요시노부를 복귀시킬 예정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요시노부를 신봉하고 신겐에게 반기를 휘날리는 세력이 출현하는 위험성을 불식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요시노부의 살해로 이르게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가독을 상속한다고 보여졌던 요시노부가 죽어서, 그 의복동생에 해당하는 가츠요리가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이 가츠요리는, 결코 기량이 뒤떨어졌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흠이 생긴 가신단을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 신겐이 요시노부를 죽이지 않고 가독을 상속했었다면, 혹은 다케다씨가 멸망하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604-00056584-jbpressz-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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