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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무장으로부터 배우다] 우에스기켄신~신겐본진을 쫓았던 무장이 “지방”수준에서 끝나버린 이유~

mmplz 2020. 8. 31. 14:23

[전국무장으로부터 배우다] 우에스기켄신~신겐본진을 쫓았던 무장이 지방수준에서 끝나버린 이유~

2020.07.26

 

우에스기켄신은 에치고 수호대, 나가오 다메카게의 막내자식으로써, 1530(쿄로쿠3)년에 카스가산성(신니이가타현 조에츠시)에서 태어났습니다. 7살 때 카스가산성 아래의 림천사에 들어가, 사서오경이나 한시에도 정통했던 주지 텐시츠코우이쿠의 교육을 받아, 워복후에는 카게토라라고 불립니다.

 

*최전선에 서서, 적진을 잘라내다.

아버지 다메카게의 사후, 가독은 형인 하루카게가 이었지만, 병약한 성격으로, 1545(텐몬14), 가신인 구로다 히데타다등이 반란했을 때, , 하루카게를 대신해서 카게토라가 출진. 그 반란을 진압하고, 더욱이 아가키타슈라고 불리는 아가노강 북부의 호족을 평정합니다.

 

이 결과, “병약한 하루카게보다도, 전술, 전략에 뛰어난 카게토라 쪽이 가독에 어울린다라는 목소리가 커져, 그러한 목소리에 밀려, 1548, 나가오가의 당추로 추천되어, 하루카게를 대신해 카스가산성주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 이후, 나가오카게토라는 1561(에이로쿠4)년 관동관령이었던 우에스기 노리마사로부터 우에스기가의 명칭과 관동관령의 직을 양도받아, “우에스기 마사토라로 개명합니다. 더욱이, 무로마치막부 13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데루로부터 데루라는 글자를 받아 데루토라라고 이름불려, 1571(겐키2)년부터는 켄신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편의상, 이하, 켄신이라고 표기하겠습니다.

 

전쟁때, 보통, 전국대명당주는 몸의 위험이 있으므로, 최전선에는 서지 않지만, 켄신은 제일 앞에서 적진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1559년의 시모노 카라사와야마성의 전투때, 호죠측 35,000명의 병사에 포위되었던 카라사와야마성을 구하기 위해, 8,000명의 병사를 통솔하여, 적의 후방을 향해, 켄신 스스로 갑옷도 입지 않고 검은 무명 도복을 입고, 십자창을 잡고, 단지 45기로, 십중 20중으로 쌓인 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진의 한가운데를 밀어 지나갔다고 일컫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전투방식으로 영토를 넓혀 에치고의 용이라고 칭해졌습니다.

 

그런 에치고의 용에 맞서는 것이 가이의 호랑이다케다신겐입니다. 켄신, 신겐의 신슈가와나카지마를 무대로한 가와나카지마의 전투, 1553년의 제1회전부터 1564년의 제5회전까지 11년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최대의 격전이었던 것이 제4차전인데, 1561(에이로쿠4)910일의 전투로, 이 전투에서 두 영웅의 일대일 전투가 있었다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켄신이 신겐의 본진 가까이까지 공격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 같은 적과 계속 싸워, 다음 세대에는 화근도

이렇게 용맹과감, 무장으로써 흠을 잡을 곳이 없는 것 같은 켄인이지만, 유감스러운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번째는, 적의 성을 제압한 후의 추적을 잘 못했던 점입니다. 앞에 서술한 카라사와산성의 예를 들면, 켄신이 되돌아와, 켄신이 에치고로 귀환하면 호죠씨가 되찾고, , 켄신이 출진하는 것을 몇번이나 했습니다. 에치고에서 산을 넘어 관동으로 쳐들어가는 에츠잔이 반복되었던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11년간이나 가와나카지마에서 다케다신겐과 싸웠던 것입니다. 켄신과 신겐인이 가와나카지마에서 서로 노려보고 있는 사이,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데루를 옹립해서 상락했던 것으로 봐도, 그 마이너스적인 면이 명확합니다. 호죠씨와 동맹하거나, 적대하며, 외교전략으로 일관성이 없었던 점도 아쉬운 점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가 후계자를 둘러싼 실패입니다. 켄신은 출진전에 반드시, 카스가성내의 비사문당에 쳐박혀서 전승기원을 했으며, 그 주문력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한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정실과 가까이 하지 않고, 측실도 가지지 않았으므로 아이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경우, 보통은 누군가 1명을 양자로 맞이 하지만, 켄신은 3명이나 양자를 맞아, 그것도, 누구에게 가독을 양도할지를 명백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카케카츠와 카게토라라고 하는 2명의 양자가 싸우는 오타데의 난을 일으키게 되어, 다음 세대에 화근을 남겨버린 것입니다.

(静岡大学名誉教授 小和田哲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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