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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성지를 가다/ 고대의 “이즈모 대신사”의 높이는 100미터였다?

mmplz 2019. 3. 20. 21:26

일본의 성지를 가다/ 고대의 이즈모 대신사의 높이는 100미터였다?


일본의 각지에는 수많은 성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파워 스팟이라는 말이 생겨나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으나, 파워 스팟의 대부분은 예전에는 성지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본의 성지를 종교학자인 시마다 히로미가 여행해봅니다.

 

이즈모 대신사의 본전의 지붕은 상당히 커서, 면적이 대략 180평정도입니다. 지붕의 두께는 약 1미터이며, 거기에 지붕을 이은 노송나무껍질은 60만 줄기에 이릅니다.

헤이세이 22년 여름, 이 대형 지붕의 견학회가 특별관람이라는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높이 12미터 부분의 공사용 발판에 견학코스가 설치되어, 대형 지붕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접근해보니, 지붕의 거대함이 잘 이해되었습니다.

 

현재의 건물을 엔쿄(1744)원년에 지어진 것으로, 에도시대의 건축물이 되는 것이지만, 신사건축으로써는 보통 이상으로 규모가 큽니다.

 

이즈모 대신사는 거대한 신전이며, 높이 8, 대략 24미터에 이릅니다. 그것도, 중고시대에 있어서는 본전의 높이는 16(48미터)으로, 상고에는 32(96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100미터 가까운 높이의 신사 같은 것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그것은 사리가 맞지 않는 공상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으나, 현재에는 오히려 이전의 이즈모 대신사는 지상으로부터 우러러보는 것과 같은 장대한 건축물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그것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메이지41(1908)년부터 42년에 걸쳐, 건축가이며 건축사가인 이토우 츄타와 역사학자이며, 신도학자인 야마모토 노부키 사이에서 이즈모 대신사의 높이에 대해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에 야마모토씨는 16장설을 주장하며, 그 근거로써 내었던 것이 구치즈사미(헤이안 시대 아동 교양서)”라고 하는 서적이었습니다. 이것은, 헤이안시대 초기의 학자, 미나모토노 타메노리가 기록한 것으로, 텐로쿠(970)원년의 연호가 기록되어 잇습니다. 이것은 어린이를 위한 교과서 같은 것으로, 구구단이 최초로 기록된 서적이기도 합니다.

 

구치즈사미에는, 건물에 대해서 당시의 베스트3가 예로 나와 있으며, “운타(雲太)、와니(和二)、쿄우산(京三)”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와니라는 것은 야마도국 동대사의 대불전이며, 쿄우산이라는 것은 대극전입니다. 그리고, 운타가 이즈모 대신사입니다. 당시의 대불전의 높이가 15(46미터)이므로, 이즈모 대신사는 그것보다도 높았던 것이 됩니다.

 

이 비교가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인지는 모릅니다. 미나모토노 타메노리가 실제로 현지에 가봤는지 어떤지도 모릅니다. 그 외에 이즈모 대신사의 높이를 나타내는 명백한 역사 자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혹시 그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하면, 헤이안 시대의 이즈모 대신사는 16장 즉, 50미터 가까운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 됩니다.

16장설, 더욱이 32장설을 뒷받침하는 것입니다만,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그의 저서 옥승간에 게재한 금륜조영도라고 하는 도면입니다. 노리나가는, “이즈모 대신사, 신전의 높이, 상고시대에는 32장이며, 중고시대에는 16장이었다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도면을 보면, 3개의 목제를 쇠고리로 묶어 하나의 기둥으로 만들었으며, 그 직경은 1, 3미터에 이릅니다. 그것을 가로세로 동일간격으로 9개를 세워, 그 위에 본전이 세워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것도, 본전에 오르기 위한 다리는 1장정도의 거리로 되어 있으므로, 100미터를 넘었던 것이 됩니다.

 

유감이지만, “금륜조영도는 평면도로, 본전이 어떤 형태를 했는지도, 어느 정도의 높이였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전에 오르기 위한 다리가 100미터를 넘는다면, 본전은 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둥은 직경이 3미터가 되기 때문에, 꽤 커다란 건물을 지탱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연 그정도로 커다란 기둥이 사용되었던 것일까? 노리나가가 아니더라도 의문이 생기는 부분입니다만, 헤이세이 12년부터 13년에 걸쳐 이즈모 대신사의 경재의 유적으로부터, 삼나무의 대형 나무 3개를 이어 만든 직경 약 3미터나 되는 거대한 기둥이 3군대서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가마쿠라 시대의 전반적으로 해당하는 호지(1248)2년에 조영된 본전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전쟁전인 쇼와 11년의 일이지만, 건축학자인 후쿠야마 토시오는 16장의 이즈모 대신사의 본전의 복원도를 작성했습니다. 100미터를 넘는 긴 본전에 오르기 위한 다리를 올라간 뒤에, 9개의 거대한 기둥에 지탱 되어있던 사전이 올라와 있는 형태의 도면입니다.

 

이것을 기초로, 대기업 건축회사인 오오바야시구미가 프로젝트 팀을 만들어서, 그 복원의 시뮬레이션을 시도해본 적도 있었습니다.

 

단지, 그 정도의 높이였다면, 본전은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 처럼, “햐쿠렌소라고 하는 서적에는, 조겐4(1031)8월에 신전이 전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람도 없는데 신사가 진동하며 목재가 한 방향으로 넘어졌으며, 단지 건각의 기둥 하나만 쓰러지지 않았다라고 전해집니다.

 

더욱이, 이 이후, 이즈모 대신사의 나라만들기인 센게가나 기타시마가의 센게가고문서기타시마가문서등에서는, “신전전도” “이즈모대신사 울머 움직이다” “신사가 옆으로 전도 하다라고 하는 기술이 보입니다.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까지의 200년간에 7번이나 넘어진 것입니다. 30년에 1번의 정도의 붕괴였습니다.

 

이즈모 대신사의 본전이 꽤 높은 건축물이었던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 번이나 전도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단지 햐쿠렌소의 기술에 근거하면, 기초공사도 확실히 되지 않은 채 기둥을 세워, 그 위에 본전이 올려진 것과 같은 형태였던 것이 아닐지요.

오오바야시구미는 헤이안 중기의 기술을 사용한 경우, 어느 정도의 공사기간과 인원, 그리고 비용으로 48미터 높이의 본전이 가능할지를 계산했습니다.

 

그 계산에 따르면, 총 공사기간은 6개월로, 공사에 동원되는 인원은 126700, 총 공사비용은 1218600만엔으로 예상됩니다. 이 액수는 일반적인 대형 빌딩의 건축비용에 해당합니다.

 

최근의 학계의 논의에서는 16장의 높이가 있던 것이 거의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전의 이즈모 대신사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가치가 높아집니다. 역으로 16장설을 부정해도, 환영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고학의 복원 작업에서는, 어느 유적이라 해도, 막무가내로 대형 건축물이 존재했던 것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기 쉽습니다.

 

애초에 현재 824미터라고 해도, 신사 건축물로서는 파격적인 높이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흥미 깊은 것이 국립 공문서관소장의 이즈모대신사종도입니다.

 

이것은 메이지8*(1875)년경에 작성된 것입니다. 현재의 신전이 에도시대인 엔쿄원(1744)년에 조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과 똑 같은 건물을 그린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중간의 마루는 현재보다도 꽤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높이가 지금과 동일하다면, 그림 그리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됩니다. 이즈모 대신사의 너무나 장대함이, 보는 사람의 시선을 왜곡했는지도 모릅니다.

 

원문출처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319-00010006-flash-p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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