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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5일을 지나서도 전쟁을 계속한 일본병사의 말로

mmplz 2020. 8. 31. 14:18

815일을 지나서도 전쟁을 계속한 일본병사의 말로

2020819일 동양경제 Online

 

대만민주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등휘 전 총통이 서거한 것은, 지난달 30일이었습니다.

일본통치하의 대만에서 태어나, 일본의 교육을 받아 자란 이등휘는, 교토대학재학중에 학도병으로써 징병됩니다. 형은 일본군으로써 필리핀에서 전사했습니다.

2007년에 방일했던 때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습니다.

 

“22세까지는 일본인이었다라고 본인이 말하는 것과 같이, 종전까지 일본인으로써 살았습니다. 이와사토 마사오라고하는 일본이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대만인으로써 정체성을 가지고, 공산내전에 진 국민당정권이 이동해온 독재체제에서, 대만인에 의한 총통직접선거를 실현시키는 등, 민주화로의 그의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등휘와 같이, 대만에서 태어나 자라, 일본인으로써 전장에 보내진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는, 종전후에도 전장에 남아 일본인으로써 타국의 독립을 위해서 싸운 전 일본병사도 있습니다.

 

*남성이 일본에 돌아오지 못한 사정

처음에 그 인물을 만났을 때, 저는 대만 출신인 것을 몰랐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지금부터 15년전의 일입니다.

 

전후60년에 해당하는 당시, 저는 종전후도 복귀를 거부하며, 스스로의 의지로 현지에 머물것을 결의한 전 일본병사를 동남아시아에 만나러 갔습니다. 백발에 장대한 노인으로, 조금 무뚝뚝했지만, 확실한 일본어를 말하며, 자신을 미야하라 에이지라고 말했습니다.

 

그 미야하라씨에게, 왜 일본에 돌아가지 않았는지, 그렇게 물어보니 돌아갈 수가 없는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돌아갈 장소가 없다

그리고, 의아한 눈동자를 보내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대만 출생이다

그리고 시간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개석이 들어왔다

미야시타가 군에 들어온 것은, 1940년의 중일전쟁이 한참일 때였습니다. 그것도 지원해서 입대했습니다.

 

당시에는 학생이어서, 사회적 경험도 없었지. 물들지 않고 순수했었지! 출정군인, 부인회로부터 전의가 대단해서. “팔굉일우 (일본 천황제 파시즘 사상 : 온 세상이 하나의 집이라고 하여, 침략전쟁을 정당화 하는 말)” . 당시에는 대동아 공영권” “식민지 해방2가지를 표어로 해서 말이지. 당시의 나는 그것을 듣고 지도를 봤어

*청년이 달려갔던 이상과 꿈

일부러 펴본 것은, 학교에 두었던 아시아를 나타낸 세계지도였습니다. “지도의 색이 한 가지 색으로 물들었던 거야

독립국이었던 일본과, 그것에 태국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아시아 지역이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모두 백인의 식민지. 중국도 반은 백인의 식민지가 되어 있지. 태국과 일본 이외는 그것도, 태국은 주변국이 전부 식민지이고..”

 

한 가지 색으로 물든 일본의 정세와, 아시아의 지도가, 일본이 거는 이상이 ㄴ해방공영권의 꿈으로 달리고 있었어

 

정의의 전쟁이라고 믿고 있었어

 

군속으로써 처음에 중국본토에 보내져, 그 다음해부터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여, 동남아시아 각지를 전전하면서, 마지막은 소위대우의 문관으로써,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종전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태평양의 섬들을 공략, 탈환해서 일본본토를 노리는 미국군의 침공 루트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전투도 없는 체로, 전력이 온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패전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의지를 잃어 자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여기는 천국이었어. 연합군은 여기에는 안와. 공습은 없어. 공격도 없어. 그래서 왜 전쟁에 진 것인가?”

아직, 싸울수 있다. 그 병사들의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향합니다. 바로 그때 일본의 패전을, 종주국인 네덜란드가 다시 돌아오고 있ㅇㅆ습니다.

 

일본군정하의 통치가 행해진 3년반 사이에,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의 젊은이를 모아 군사교련을 해서, 의용군을 만들었어. 이것을 페타라고 말했지. 각토지의 우수한 젊은이를 모아서 말이지. 이것이 일본이 패배하니 해산되어 버렸어. 그래서 각지로 돌아가서, 네덜란드 군을 치지 않으면 안되었지. 즉 독립운동이었던 것이야

 

의용군을 조직했던 것이, 인도네시아 독자의 독립운동을 견인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군이 들어온 것이 발화점이 되었지. “루무테카” – “독립이라고하는 의미인데, 이것이 암구호가 되어, 각지에서 통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그랬더니, 구 종주국의 재상륙에 맞춰서, 이번에는 페타나 인도네시아군 쪽에서, 일본병사를 권유하러 왔지. 독립전쟁을 이기기 위한 군사지도가 필요하니, 함께 싸웠으면 한다고 말했지.

 

이 부름에 많은 일본병사가 응해, 독립전쟁에 참가했습니다. 그 숫자는 1,000명이나 2,000명이라고 하는데, 미야하라도 그중 한명이었습니다.

 

*미야하라가 계속 믿었던 정의의 전쟁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부대를 뛰쳐나갔지. 잔류라고하는 말은 의지가 안돼. 그러한 환경하에 놓였던거야. 독립에 걸은 것이지, 긍정적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목적이니까, 독립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네덜란드군에게 잡혀 처형당한다. 적이 들어와 있는 대만에 돌아가도 처벌받기만 할 것이고. 일본도 미국에 점령당해서, 어떻게 되는지 알수가 없고. 더구나 부대를 나와서는 탈주병이지. 그래서, 이제 제2의 인생을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걸었던거야. 말하자면, 도박이다! 인생의!”

 

그것은 미야하라 자신이 정의의 전쟁이라고 빋었던 식민지해방을 실천하는 길을 걷는 것과 어느새 겹쳐져 있었습니다.

 

하느냐 반대하느냐, 그 한가지라고. 이러한 인생으로 태어난 것이야!”

이렇게 194912월까지의 전쟁을 계속하여, 다음해 인도네시아는 공식으로 독립을 합니다.

 

단지, 그렇게 되니 독립전쟁에 진 일본병사들의 역할도 끝나서, 있을 곳이 없어졌습니다. 어떤자는 일본에 귀국하고, 어떤 사람은 현지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미야하라는 가족을 가지고, 일본에 수출로 사업을하여 일어나, 동경에서 진출해온 냉동기 메이커와 회사를 설립한 것이 전기가 되어 재물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잔류 일본병의 무엇인가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전일본병사가 가난한 방에서 고독사한 것을 계기로, 상호회조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1979년의 일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 복지우회라고 말했습니다.

 

당초에는 300명 가까이 이름이 명부에 있었습니다. 그 사무를 자원봉사로 맡아 했던 것이 미야하라 였습니다. 단지, 제가 자카르타를 방문한 15년전은, 10명 아래였습니다.

 

지금 살아남아있는 것은, 인도네시아 전체에서 단지 9명만이다! 나머지는 모두 죽었어!”

그렇게 굳세게 말한 미야하라도, 이제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제가 한명 한명에게 이야기를 물었던 9명은 전후 75년인 지금에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당시 인터뷰는 졸저 귀한 못하고 잔류일본병사 60년째의 증언에 상세 참조)

 

*미야하라의 삶은 가난한자의 복권이었던 것일까?

미야하라에게는 중국이름도 있었습니다. 청나라 시절에, 이민으로 대만을 건너간 8대손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미야하라는 그것은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라고 강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일본인이야! 일본인으로써 살아왔어! 아이덴티티도 일본인이야!”

이등휘는 생전, 시바료다로와의 회담에서 대만에서 태어난 비원이라고 하는 말을 했습니다. 다른편으로 미야하라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명백하게 말하자면, 가난한자의 복권을 뽑은거야. 태어났을 때, 일본으로써 태어났어. 일본인으로써 교육도 받고, 국민의 의무로써, 전쟁에 징발되었지. 전쟁에 지고, 환경이 변했어. 돌아갈 수 없으니 인도네시아군에 참가하여, 독립을 얻었지. 애국지사로써, 긍지를 가지고 있어. 그런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일본인의 동남아 땅에서의 삶은 가난한자의 복권비애도 아닙니다. 미야하라 뿐만이 아니라, 전후를 싸워온 구 일본병사들의 모습이 없다면, 지금의 인도네시아도 아시아도 없었음에 분명합니다.

 

 

 

 

 

 

https://news.yahoo.co.jp/articles/ab1d2152e6aa90b273633039826526701ab6de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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